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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공모주제동고 - 취준생 리얼 현실 취준라이프
대상현 취준생제목25시 라이프, 평생 꺼지지 않을 순간


사원증을 목에 걸고 한 손에는 쓰디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쥔 채, 숨 가쁜 지하철 틈을 파고드는 내가 보인다. 누구와 같이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잠깐 뒤를 돌아보니 날렵한 구두 굽이 눈에 띈다. 적어도 7센티는 거뜬히 넘길 것 같은 아찔한 높이인데 그래, 뒤꿈치 정도는 아파줘야지. 그래야 청춘답지. 어깨에 걸린 큰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오늘 할 일을 다시 한번 체크해본다. 미팅 가기 전에 확인 사항을 몇 번이고 보는 건 실수를 싫어하는 내 성격 때문이다. 포스트잇 덕지덕지 붙은 내 자리에 평소와 다른 게 보인다. 누군가에게서 온 꽃바구니. 아무 이름도 없는 빈 카드가 꽂혀있다.


소설 쓴다, 소설 써. 현실은 다음 달 갚을 카드 값이 심장에 꽂혀있다.

드라마에서나 볼 것 같은 이 이야기는 10대에 내가 꿈꾸던 서른 중반의 모습이었다. 몇 센티 힐을 신는지까지 자세히 묘사된, 꼼꼼하고 치밀한 미래 설계가 또 어디 있을까 소름이 끼칠 정도다. 꽤 괜찮은 회사에서 사원증을 당당히 목에 걸고, 싱글 라이프를 즐기기에 모자람이 없는 집과 차. 지금쯤 드라마틱하게 꽃바구니 주인공이 나타나야 맞는데 실은 다음 달 월세 날 다가오는 게 두렵다.


꿈을 좇아 일을 찾아보겠다고 다짐한 지 2년. 나는 아무도 모르는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집 앞 편의점에 갈 때도 새벽 3시. 모자를 꾹 눌러 쓴 차림을 고수하게 되었다. 낮에 들렀던 편의점에서 계산하고 나오면서 ‘남들 다 회사 갈 시간인데.’ 하는 생각이 든 후로 모두 잠든 시간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깜깜한 어둠 속에 한없이 숨고만 싶었다. 공채 소식이 들려오는 곳마다 손을 뻗어보고, 이력서를 수없이 고치고 쓰면서도 해외연수 경험, 자격증 등. 채울 수 없는 빈칸에 자신감도 함께 비워지고 있었다. 운 좋게 면접을 보게 되면 ‘나이는 꽤 많은데 경험이 없네요.’라는 말로 나의 시간이 부정당하는 기분도 들었다. 분명 나는, 걷고 있는데…… 앞으로 가고 있는데.


얼마 후, 엄마로부터 택배가 도착했다. 김치와 반찬이 조금이라도 흐를까 꽁꽁 감아 놓은 상자 안에 엄마의 글씨가 울고 있었다. 내 마음처럼. 물기가 묻어 김치 봉투에 달라붙은 엄마의 메시지. 번진 글자들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았다.

“엄마는 걱정 없다. 당차고 씩씩한 우리 딸.

지금처럼 노력하면 좋은 기회가 올 거야.

엄마는 너처럼 열심히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밥 거르지 말고 먹어.”

엄마의 편지 한 장에 내 삶이 번지듯 보이는 것 같았다. 순간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정말 난 열심히 사는 걸까. 그럼, 엄마 말이 맞다. 자격증을 준비하고, 틈틈이 일도 하고, 밤이면 이력서 다듬으면서 남들 일하는 시간보다 몇 배는 더 치열하게 살고 있는데 왜 주춤거리고 숨기만 했을까. 


여전히 상상 속 나와는 다르고 이력서는 징글징글하게 또 쓰고 있지만 그날을 계기로 숨바꼭질은 끝났다. 취준생 신분에 월세도 내고, 가끔 치킨도 시켜 먹으면서 어떻게든 내 삶을 책임지고 있으니까. 유일하게 나만 채울 수 있는 칸을 발견하는 곳을 만난다면 그곳에서 전문성을 키우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남들’ 다 다니는 회사에 취업만을 꿈꿨던 나는 이제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다시 찾아가고 있다.

내일은 편의점 가서 맛있는 디저트 사 와야지. 달달한 거 먹으면서 이력서 써야지. 얼마의 시간이 흘러도 매일 치열하게 준비했던 이 시간은 평생 꺼지지 않고 남아있을 것 같다.


나 너보다 더 열심히 산다. 몰랐지. 나, 25시라고.!


* 해당 수상작은 컷툰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추억이 될 상

이름
강연수공모주제동고 - 취준생 리얼 현실 취준라이프
대상현 취준생제목오늘 저녁은 백순대


일하고 돌아온 언니에게 저녁을 해주는 건 내 취미생활 같은 거였다. 말하자면, 햄스터 밥 주기쯤으로도 비유될 수 있는.

나도 취준하느라 바쁘지만 언니한테 뭘 먹이는 게 나의 크나큰 즐거움 중 하나이기 때문에 나는 이틀에 한 번꼴로는 꼭 무언가를 해주었다.

 

그날의 메뉴는 백순대였다. 서류를 제출한 날엔 괜히 몸에 해롭고 맛있는 게 당기기 때문에 마트 구석에 진열된 반조리식 백순대를 골라집었다.

2인분쯤 되는 백순대를 열심히 지지고 볶고 들깨를 뿌리고 하다 보니 언니가 귀가했다. 언니는 들어오자마자 손을 후다닥 씻고는 내가 있는 부엌으로 직진해서 물었다.

"뭐야?" "백순대"

언니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물었다.

"아니, 이거 뭐냐고 네가 만들고 있는 거"

"이거 백순대라고"

 

들깨가루를 통째로 쏟아부은 이 비주얼이 믿기지 않아서 두 번 물어보나, 싶었다.

언니는 3초쯤 가만히 있더니, 이내 빵 터져서는 몸을 뒤로 돌리고 웃었다.

저 언니가 일이 빡세다더니 드디어 실성을 했나 봐, 하며 안쓰러워지려 할 즈음 언니가 웃음을 머금고 답했다.

"아 미안. 백순대라길래 자기소개하는 줄 알았어. 너 백수라고. 나는 얘가 왜 뜬금없이 지 백수인 걸 알려주나 했네." 내가 말했던 '백순대'가 언니한텐 '(나) 백순데?'라고 들렸던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말을 뱉어놓고도 감히 백수가 차려준 저녁을 먹으려 드는 언니가 우스웠지만, 그래도 솔직히 자기 전에 한 번 더 웃을 에피소드 정도는 된다고 생각해서 쿨하게 넘겼다.

 

다소 모욕적이어도 웃기면 장땡인 게 언니와 나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렇게 프라이팬째로 부엌 식탁에 놓고 우리는 전투적으로 식사를 할 참이었다.
언니가 백순대 하나를 먹어보더니 말했다.
"야 이거 좀 짜다."
"백수의 눈물이 들어갔나 보지."
"아 그래? 그럼 취업하고 또 해줘, 그땐 간 딱 맞겠다."
이 말을 끝으로 언니는 백수의 백순대를 열심히 퍼먹기 시작했다. 진짜 얄미운데, 진짜 웃겨서 또다시 쿨하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25년 내내 한 게 티키타카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상황의 대화가 이런 식이었다.

나는 웃으며 두고 봐라, 가만 안 둬 등 여느 복수극의 대사를 열댓 번 중얼거린 후 식사에 임했다. 그렇게 열심히 한참을 먹던 언니는 마지막 남은 백순대 하나를 내 밥그릇 위에 얹어주었다.
"많이 먹고 힘내. 사실 언니는 네가 취업 빨리하는 것보단 진짜 하고 싶은 걸 먼저 찾으면 좋겠어. 돈은 언니가 벌 테니까. "
마지막 남은 거 주는 거면서 뭘 많이 먹으라는 건지. 그래도 힘은 났다. 이 언니는 참 웃기다 울리는 쪽으로는 타고났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는데, 웃다가 울면 어떻게 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마도, 다시 웃게 되겠지.

추억이 될 상

이름
이성희공모주제동고 - 취준생 리얼 현실 취준라이프
대상구 취준생 (현 직장인)제목엽서 한장


오늘 한 통의 엽서가 도착했다.  

1년 전 내가 나에게 보내는 엽서였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내 미래가 싫었다. 벌써 몇 번째 떨어지는 건지, 올해로 3년째다. 흔히들 얘기하는 나는 ‘공시족’이다. 지방대를 졸업하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와도 취업하기 힘든 세상에 나는 소위 말하는 듣보잡 지방대를 졸업했다. 당연히 나를 뽑아주는 곳은 없었다. 대학 4학년부터 내내 취업준비를 했지만 졸업하고 1년이 지나도 나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같은 대학 동기와 노량진 고시원에 자리를 잡았다. 공부를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는 의기양양했다. 믿을 건 젊은 패기뿐이었고 그깟 공무원 시험 붙어서 금의환향하자 서로 다짐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께는 시험에 붙기 전까지 내려가지 않을 거라 호헌 장담을 했다. 평생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셨다. 내가 지방대를 갔을 때도 무슨 서울대를 입학한 것 마냥 기뻐하셨다. 그리고 내가 다시 공무원 시험공부를 한다니, 곧 나라 위해 일하는 일꾼이 된다며 이미 공무원이 된 것 마냥 자랑스러워하셨다. “아이구, 우리 아들은 한 번에 딱 붙을 껴!” 하며 동네방네 자랑을 늘어놓으셨고, 그 덕에 나는 더욱 고향에 내려갈 수 없었다. 소위 너무 쪽팔려서..


그렇게 부모님이 힘든 농사를 지어 고시원비와 학원비를 보태준 지 3년이 되었다. 그리고 올해 또 떨어졌다. 나는 부모님께 차마 또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답답한 마음에 친구와 바다를 보러 갔다. 시원한 영종대교는 내 인생과 다르게 뻥 뚫려있었다. 한참을 달리다 친구가 화장실에 좀 가자며 들어간 곳이 영종대교 휴게소였다. 요즘 휴게소는 옛날 휴게소와 다르게 근사했다. 카페며, 전망대 심지어 다양한 전시물품도 놓여있었다. 대부분이 가족들, 연인들이었고 추레한 추리닝을 입고 있는 것은 우리 둘뿐이었다. 친구가 먼저 그 빨간 우체통을 발견했다.


“야! 여기 무슨 우체통이 있는데! 편지 써서 이 우체통에 넣으면 1년 뒤에 배달된데.”

“진짜? 거짓말 아냐. 요즘 그런 게 어딨어? 얼마야?”

“공짜라는데.. 우리 한번 써보자. 설마 1년 뒤에도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겠지.”

친구와 나는 엽서 한 장씩을 집어 들고 서로 멀찌감치 앉았다.

“근데 이거 주소를 어디로 하지? 고시원으로 해야 하나? 그럼 1년 더 그 고시원에 있어야하나? 너, 더 공부할 거야?” 친구가 물었고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에잇, 몰라.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그냥 고시원 주소 적어.” 내가 말했고, 그렇게 고시원 주소가 적힌 두 장의 엽서는 빨간 우체통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인천 앞바다에 도착해 바다를 보며 진지하게 우리의 미래를 고민했다.

“너 또 시험 볼 거야?”

친구가 물었다. 나는 한참을 말없이 바다만 바라봤다. 친구도 말이 없었다. 둘 다 답을 알지 못하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친구가 말했다.

“아이씨, 야! 나, 내 청춘 아까워 그냥 이렇게 못 끝내. 나, 낼 모레 서른이다. 이제 진짜 나 뽑아 줄 구멍가게도 없어. 올인이다. 다시 한 번 할 거야. 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논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렇게 짧은 일탈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와 나는 한참을 방황했다. 친구는 진짜 마음을 다잡았는지 핸드폰까지 정지해 가며 공부를 했다. 그리고 나도 한 번만 더 해보자 결정했다. 진짜 독하게 공부했다. 친구도, 나도 미친 듯이 했다. 우린 서로 고3 때 우리가 이렇게 공부했으면 서울대도 갔을 거라며 농담을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고 다음 해 시험을 보았다. 기회도 준비된 자에게 온다더니, 그 해 공무원 채용인원은 다른 해보다 2배 가까이 많았다. 그리고 우린 둘 다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보통 1.5배수로 필기시험 합격자를 뽑으니, 면접이라는 또 다른 관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면접 전 날 우린 둘 다 얼굴에 팩 한 장씩을 붙이고 잡을 잤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미용실에 가서 머리에 힘을 주고 얼굴에 분칠도 했다.

“야. 나 완전 버벅 거렸어. 어떻게...... 떨어질 것 같아.”

면접장을 나온 친구 얼굴은 울상이었다. 나는 딱히 위로를 해 줄 수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거사를 치르고 초조하게 시험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1년 전 우리가 쓴 엽서가 도착한 것이다. 엽서를 들고 옆방에 있던 친구가 나에게 달려왔다.

“야...... 너 엽서 받았어? 우리 작년에 시험 떨어지고 바다 보러갔을 때, 휴게소에서 엽서 썼잖아. 그거 도착했어. 나 왠지 느낌 좋다. 그 엽서도 받고, 내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질 것 같다. 느낌이 좋아”

친구는 엽서를 팔랑거리며 보여줬다. 친구에게 말은 안했지만 내 서랍 안에도 그때 썼던 엽서가 들어있었다. 나는 우울했다. 왜 하필 그런 글을 적었을까? 그리고 친구에게는 내 것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며칠 뒤 시험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둘.....다.....합격을 했다. 진짜 합격을 한 것이다. 나의 지난 4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눈물이 났다. 그리고 던져 버렸던 엽서를 다시 서랍에서 꺼냈다. 엽서 위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쳐다보기도 싫었던 그 엽서가 이제는 달리 보였다. 나의 힘들었던 과거의 소중한 추억거리가 되었다.

그날 우리 둘은 술을 마셨다. 술이 취해서 그랬는지 너무 기뻐서 그랬는지, 남자 둘이 돼지 껍데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엉엉 울었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쳐다봤다. 그래도 우리는 상관없었다. 얼마나 우리가 힘들었는지 우리만 알았고, 우리는 분명 그것을 즐길 자격이 있었다.

아깝게 됐상

이름
김태형공모주제동고 - 취준생 리얼 현실 취준라이프
대상구 취준생 ( 현 직장인)제목취업에도 정답이 있나요?


취업이 정말로 어렵다는 시대. 취업과 관련한 각종 전문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취업 컨설턴트부터, 취업 정보 유튜버까지. 그분들은 나름의 노하우를 가지고 각종 질문에 어떻게 글을 쓸지, 말을 할지 '모범 답안'을 알려주고 있다. 미친 듯이 알바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온 나에게 취업 컨설팅 비용이 부담스러운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모두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취업 준비생들이 천편일률적인 답을 쏟아낸다면 서류 전형, 면접 전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취업 컨설팅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했다. 그리고 나는 '거짓 없이, 진실 된 답변'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고 각 전형을 준비했다. 하지만 '솔직함' 하나로 최종 합격을 거머쥐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취업 준비 기간은 꽤 길어졌다. 정말 잘 봤다고 생각했던 면접에서도 탈락의 고배를 마신 후, 진지하게 면접을 복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음에 걸리는 질문이 딱 하나가 떠올랐는데, 바로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였다.

나는 솔직하게 답변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이건 어느 누가 물어도 똑같은 답을 했을 것이다. 폐지를 주워가며 힘들게 우리 삼 남매를 키워주신 할머니가 돌아가신 순간보다 힘든 순간은 없었다. 면접 때 감정을 주체 못 할 때도 가끔 있었지만, '솔직함'을 최우선으로 뒀던 나는 나쁜 답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면접관들은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가끔 답변을 끊어버리거나, 그 답변 이후로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는 면접관도 있었다. 사실 면접관의 마음을 모두 알 수 없지만, 정말 잘 봤다고 생각했던 면접에서도 탈락의 고배를 마셨기에, 마음에 걸리는 장면은 그 장면 하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무료 취업 컨설팅을 받기도 하고, 취업 정보 유튜버의 방송도 보기 시작했다. 그 질문을 받을 때 가정사를 얘기하는 것은 많은 취준생이 저지르는 실수라고 말하는 유튜버를 보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를 보여줘야 하는 면접 자리에서 내가 아닌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은 면접자인가'하는 고민이 함께 생겼다. 나는 할머니 손에, 가난한 상황에서 자라왔지만, 잘 자랐고 이처럼 대단한 기업의 면접 자리까지 와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힘든 순간을 묻는 질문에 맞는 답변을 다음 면접까지도 준비하지 못했다.

 

다음 면접은 한 비영리단체의 면접이었다. 안타깝게도, 어김없이 그 질문은 나를 향했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나는 잠깐 고민 후 다시 할머니의 이야기를 했다.

"제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저희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폐지를 주워가며 저희 삼 남매를 힘들게 키우셨는데, 호강 한 번 시켜드리지 못하고 할머니를 보내야 해서 마음이 너무 안 좋았습니다. 저희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치매 증상이 있으셨는데, OO 재단에서 치매 보조 기기 지원 사업과 관련 캠페인을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할머니께 다하지 못한 효도를 OO 재단의 간사가 되어 저희 할머니와 같은 분들을 위해 힘쓰고 싶습니다."

글썽이며 답변을 마친 나를 보며 한 면접관은 함께 눈물을 흘려주셨다. 결국 나는 최종 합격을 했고, 그 면접관님께서 국장님으로 계신 국의 신입 간사가 되었다.

 

취업에 정답이 있냐는 질문을 한다면, 모범 답안은 있을 수 있어도 정답은 있을 수 없다는 답을 하고 싶다. 코로나19로 인해 힘들 많은 취업 준비생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이 기간에 임한다면 언젠간 좋은 결과를 얻을 것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아깝게 됐상

이름
신자연공모주제동고 - 취준생 리얼 현실 취준라이프
대상구 취준생 ( 현 직장인)제목코로나와 우산


중국 우한이라는 곳에서 신종 바이러스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연신 나왔다. 처음에는 중국에서만 유행한다고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곧 나에게 위기가 다가왔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취업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매출이 갑자기 줄어 이번 달까지만 일해달라고 하셨다. 

평소 내성적인 성격이고 조용한 편이라 알겠다고 대답했다. 마음속으로는 다음 달 월세와 생활비 걱정이 가득했지만 소심한 편이라 계약사항을 들어 따지지는 못했다. 생각했던 취업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준비하던 영어시험 접수를 위해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공지사항에는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에 따라 시험을 무기한 연기한다고 했다. 맥이 탁 풀렸다.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이력서를 몇 번이고 보냈지만, 확인 후 연락을 준다는 답장만 받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부족하고 못났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러다 문득 ‘취업의 문을 잘 못 두드리고 있는 건가?’라는 의문이 생겼다. 나만의 생각에 갇혀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을 거야!'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지만, 물러설 곳이 없었다. 매일 새벽까지 잠 못 들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신세 한탄만 하기 싫었다. 이력서를 새로 작성했다. 한동안 연락은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지원하신 신한카드 담당자인데요.” “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말에 뛸 듯이 기뻤다. 면접 장소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지하철역을 나와 버스정류장에 도착할 때였다. 갑자기 한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금세 폭우가 되었다. 황급히 비를 피하려고 눈에 보이는 건물 입구로 달려갔다.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라고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비에 우산이 없는 사람들로 붐볐다. 점점 면접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비는 잦아들지 않았다. 이 비를 맞고 면접장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마스크를 써 더 답답했다. 우산을 살 곳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서서 발만 동동 굴렀다. 버스를 타고 내려서도 한참 걸어야 도착하는 곳이었다. 택시를 잡으러 도로로 나가도 홀딱 젖을 비였다. 하늘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집에 다시 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왔다. 무작정 가방을 머리 위에 올리고 황급히 뛰어 버스 올랐다.


‘그래도 처음 면접인데 가보자.’

교통카드를 대자 기사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마스크 없어요?”

순간 며칠 전 마스크를 쓰지 않아 버스탑승이 거부되었다는 기사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 마스크 썼는데요?”

마스크 때문에 의사소통이 잘 안 되었다.

“아가씨, 우산 없냐고요?”

아저씨가 재차 말씀하셨다. 쭈뼛 주뼛 대답을 머뭇거리는데 나에게 노란 우산 하나를 꺼내주셨다. 검은 정장 치마에 흰 블라우스 입은 모습 때문인지 면접 보러 가는 걸 아시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연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저씨는 가볍게 손을 들어 답해주셨다. 비록 낡고 잘 펴지지 않았지만, 비를 피하는데 문제없었다.


 다행히 면접 장소에는 시간에 맞게 도착했다. 막상 마스크를 착용하고 눈만 보이는 면접관을 대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준비해왔던 자기 소개말이 머리 속에서 빙빙 돌기만 했다.

“많이 긴장하셨나 봐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갑자기 버스 아저씨의 노란 우산이 생각났다. ‘버스 아저씨가 면접 잘 보라고 우산도 주셨잖아. 힘내자!’

갑자기 기운이 났다.

마스크 때문에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 것 같아 다시 크게 말하기 시작했다. 면접관분들도 갑자기 커진 말소리에 흠칫 놀라는 눈치였지만 목소리가 좋다고 칭찬하셨다. 


드디어 면접이 끝났다. 면접결과는 문자로 보내준다고 했다. 준비해간 말들을 다 하지 못해 아쉬움도 있었지만, 다음에 더 잘하자고 스스로 다독이며 집에 왔다. 

비는 소나기가 아니었다. 집에 오는 내내 비가 왔다. 버스 아저씨가 우산을 안 주셨으면 난 그대로 집에 왔어야만 했다. 비를 맞고 면접장에 들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만 복이 없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좌우명이 되었다. 시도해보고 안 돼면 어쩔 수 없지만 도전하지 않고서 처음부터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인생은 매 순간 선택과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버스를 안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면 오늘의 나는 또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산으로 지지하고 응원해주신 버스 아저씨! 고맙습니다. 저는 합격해서 출근 잘 하고 있어요! 저도 우산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더 큰 우산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아깝게 됐상

이름
반다예공모주제동고 - 취준생 리얼 현실 취준라이프
대상현 취준생제목매일 흔들리는 새벽


나 괜찮은게 맞을까 몇 번이나 물어본다.

나를 보던 스쳐지나가던 눈빛들이 

잔상처럼 내 안에 짙게 남는다.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나의 내일이 궁금하진 않는지 

곁을 지켜주는 새벽에게 인사해

이 밤도 낮이되면 다른 색을 띄겠지

 

내 세상을 담아낼 수 있는게

이 하늘이라면

나는 얼마나 큰 꿈을 품을 수 있을까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지않고

온 세상을 담아 깊은 눈으로 볼 수 있을까

그땐 내 겨울이 녹을까?

눈이 피어 덮어진 내 마음이 녹아

더 푸른 빛을 낼 수 있다면

이 새벽을 품어 창을 너머 기도할게

무겁게 느껴졌던 것들이 다 괜찮다고

아깝게 됐상

이름
박성주공모주제동고 - 취준생 리얼 현실 취준라이프
대상현 취준생제목나는 나를 데리고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난 내가 이렇게 오래 취준생으로 지낼 줄은 몰랐어.”

몇 달 전 취업 준비 중인 친구와 전화를 하다 나눈 대화였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업을 한 뒤, 1년 동안 일을 하다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스트레스로 일을 때려치우고 하고 싶었던 일을 배우기 위해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은 다르다는 걸 실감하며 다시 해 왔던 일로 돌아가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던 차에 코로나 19가 터져 준비 중이던 시험과 면접들이 밀려 끝이 없는 취준생으로 되었다

“나도 그래”

그녀의 말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취준생이 될지 몰랐다. 고등학교 학창 시절 때까지만 해도 대학은커녕 막연히 어떻게든 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과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다른 지역의 한 4년제 대학으로 입학을 하게 된 후, 나의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다양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함께 밥을 먹었다. 새로운 환경과 낯선 생활에 익숙해지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함께 지낼 동기들의 얼굴만이라도 익혀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1년 동안은 활기찬 척 즐거운 척을 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하루하루를 보내려고 애썼다. 다만 그런 생활 중 사람들과의 트러블로 일어나는 사건과 오해를 견디기란 쉽지 않았다.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세상엔 수많은 사람이 살아간다는 걸 깨달았을 때쯤 그런 생활에 지쳐 나는 혼자서 지내는 삶을 선택했다.

워낙 독립적이고 혼자가 편한 성격 덕에 혼자서 지내는 생활은 평화롭고 사람들 앞에서 활기찬 적하며 거짓말로 꾸며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게 마음이 놓였고 편했다. 대학을 입학하고 내생에 다시는 없을 우여곡절을 다 겪고 겨우 졸업장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나의 미래가 길고 긴 취업준비생이라고 부르며 백수라고 읽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대학 입학을 하고 얼마 안 가 전공으로 취업한 사람들은 과에 열 명도 채 되지 않는다던 한 선배의 말이 맞았다는 걸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알게 됐다. 대졸자 중 절반이 전공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취업한다는 뉴스 기사들처럼 내가 다니던 과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대외활동에 자격증을 따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4년의 시간 동안 나는 전공 공부를 겨우겨우 따라가기 바빴고, 인간관계의 회의감으로 그 어떤 일에도 집중하지 못해 상담을 다니며 나를 끌고 악착같이 버티며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는 자에겐 어떤 기회도 없다는 당연한 공식이 내게 다가왔을 때, 취업 준비는커녕 학교 공부도, 내 삶도 나는 쫓아가지 못한 채 나는 4학년 막 학기를 맞았다. 졸업논문을 위해 팀을 짤 때부터 나는 수많은 동기무리 중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아 팀을 짜지도 못하고 있었고, 두 번의 인원조정 끝에 그냥 얼굴만 아는 동기들과 같은 조가 되었지만, 그 팀에서 나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내가 없어도 졸업논문은 잘만 만들어졌고, 그들은 나에게 전혀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막판에 가서야 잡일 정도를 도와 운이 좋게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졸업 논문을 끝낼 수 있던 건 동기들이 착했던 덕분이었다. 4년의 내 대학 생활을 중 유일하게 운이 좋았던 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졸업논문이 마무리되어갈 때 나의 상담도 끝이 났다.

해결책도 없이 나는 그렇게 기말고사를 끝으로 다신 돌아오질 못할 대학 생활의 끝을 냈다. 대학 졸업과 함께 나는 아무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 떨어졌다. 내 앞은 모래뿐이라 길을 찾기란 너무나 버겁게 느껴졌다.


취준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어도 나는 일단 어엿한 어른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다. 취직 전 사회 경험이라는 명분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내가 해야 하는 업무나 일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나는 일하는 하루하루가 힘겨운 날들처럼 느껴졌다. 업무가 처음이라 그런 거라 생각했던 내 생각과는 달리 퇴근하는 길을 웃으면서 돌아가는 날은 없었다. 사회는 현실적인 내 성격보다 더 현실적인 곳이라 힘든 마음에 퇴근길을 울며 돌아가곤 했었다. 집에 도착해선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나오지 않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나 서러웠던 적이 없었다. 아르바이트하며 사소한 일 하나에 서투른 자신이, 힘들어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제 나약함을 저주했다. 부족한 자신의 모습에 자신감은 자꾸만 떨어졌고 그로 인해 근무 중 잦은 실수와 긴장해서 굳어버린 표정이 손님들에게 컴플레인을 받게 했고, 업무능률은커녕 기본적인 업무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일이 잦아 결국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후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너무나 버겁게 느껴졌고, 졸업 후 취업을 못 하고 자소서 작성만 하는 자신을 보며 더는 떨어질 것이 없는 자존감과 자신감은 겨우 연락이 온 면접에서도 최악의 결과만 만들 뿐이었다.


이런 생활이 익숙해질까 두려워하던 찰라, 어디를 가든 컴퓨터 관련 자격증 하나는 있는 게 좋다는 친구의 말에 학원을 찾아보고 배워보고 싶었던 분야였던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배울 수 있는 학원에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어디든 나를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할 수 있는 거면 뭐든 좋다고 생각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컴퓨터라곤 대학 시절 보고서와 발표를 위해 썼던 한글과 피피티가 전부였던 나에게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은 거의 신문물을 접하는 것과 같았다. 휴대폰 하나를 새로 구매해도 사용법을 익히는데 설명서를 몇 번이나 읽어도 두세 달이 넘게 걸리는 내가 수업을 이해하고 따라가리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 수업 날부터 다 같이 듣는 수업에서 나 혼자만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민폐를 끼치며 겨우 수업을 끝냈다. 수업이 끝났음에도 파일 저장하는 것 하나를 못 해 헤매고 또 헤맸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파일을 저장하고 수업이 마무리되었지만, 그 순간은 다신 잊지 못할 정도로 스스로가 한심하고 부끄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아 몇 번이나 침을 삼켰었다.

남들보다 두세 배, 아니 그 이상의 공부가 필요했다는 걸 그날 깨닫고 수업이 끝나고 바로 포토샵 관련 디자인 책들을 구매해 읽고 공부를 했다. 학원 수업이 있는 날에는 조금 일찍 학원에 가서 공부해둔 노트를 보고 메모도 하며 열심히 노력했지만, 나의 동기들은 내가 겨우 한 걸음을 걸으면 이미 저만치 멀리 가 있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의 평균속도에 맞춰 진도를 나갔고, 나는 매 수업을 들으며 몇 번이나 버벅거리고 뒤처짐을 반복했고 몇 개월 후 학생들의 속도에 나는 전혀 따라가지 못해 결국 수업을 바꿔 다른 강의를 들으며 내 진도를 따로 맞춰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취업을 위한 포트폴리오를 위해 준비한 작품 하나가 3개월에 결려 완성했을 때 선생님은 내가 너무 느리고 그건 문제가 크다고 말했을 때 나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는 평균에 속하지 못했다는 그 사실이 슬펐던 적은 없었지만, 수업속도를 따라가는 게 어려워 남아서 공부를 하던 순간에도 따라가지 못하던 수업내용을 혼자 따라가기 위해 애쓰고 또 애썼다. 하지만 거북이가 하루아침에 토끼가 되는 일은 없었다.

1년의 수업을 그렇게 들었지만 따라가지 못하던 수업을 내 속도가 따라가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학원 수업을 끝마치고 배운 걸 떠올리며 다시 해보기 위해 공부를 하다가도 기억이 나지 않아 울기도 한 날도 많았다. 벼랑 끝에 몰려 그냥 떨어지는 편이 편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았다. 학원이 끝나갈 무렵 나는 내가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을까 봐 두려워했고, 친구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나를 응원했지만 나는 나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학원 수업이 끝나고 두 달간 외출을 하지 못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날들이 많아졌다. 아르바이트도 사람이 무섭고 일을 잘하지 못할까 봐 지레 겁을 먹고 지원도 못 하는 날이 이어졌다.

가족들의 눈칫밥을 먹으며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이력서를 제출했을 때도 이미 학원에 다니며 1년의 세월을 보낸 탓에 전공과 관련된 일은 지원을 해도 면접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러다 무료로 취업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보고 신청해서 6월과 8월에 처음으로 외출이라는 걸 했다. 교육도 중요했지만 일단 숨을 쉴 수 있는 외출을 했다는 것에 조금이나마 스스로 응원으로 여겼다. 취업 교육을 통해 운 좋게 면접을 볼 기회가 생겨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지만 면접은 최악이었다. 집에서 1시간 정도의 거리의 회사였는데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복잡함에도 겨우 잡은 기회라는 생각에 면접을 보러 갔었다. 청심환이라도 먹어야 할 정도로 심하게 긴장한 나의 나쁜 버릇은 면접에선 가장 큰 문제로 작용했다. 취업이 아니라 아르바이트 면접이었더라도 나의 떨어진 자존감과 자신감, 그리고 면접에서의 긴장감은 아무리 상담을 받고 다양한 면접을 다녀도 나아지지 못했다.

그 뒤로 집에 다시 처박혀 나갈 생각을 못 했다. 외출이 겁나기 시작했다. 자격증 공부도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몰라 손도 대지 못하고 딱 이대로 죽을 수 있겠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건 나를 좌절로 끌고 가 땅굴을 파고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땅굴 속은 따뜻하고 안전해서 나를 괴롭히는 것도 나를 위협하는 것도 하나 없었다. 이곳에서라면 상처받을 일도 상처를 줄 일도 없었고 계속 이 편안함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사라질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취준생 기간이 오래될수록 나의 자존감은 땅 밑 끝까지 떨어져 빛 하나 없는 깊고 깊은 절벽 밑에서 올라오지도 못한 채 그곳에 있었다. 힘들다는 말도 길어진 취업 준비 기간만큼 입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말이 되고,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도,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나보다 더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많이 있었기에 나의 힘듦은 아주 작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연휴라도 맞이하면 나는 투명 인간이 되기 위해 그들을 만나지 않거나 연락을 피하는 방법을 택하고 부모님도 애써 내 얘길 하지 않기 시작했다.


“힘내”라는 위로와 응원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로 느껴본 적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취준생이 되고 1년 가까이 힘내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 말은 취준생이 된 지 초반까지는 정말 진심의 응원으로 들렸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2년 차 취준생 시절에 듣게 된 힘내라는 말에 나는 분노가 치솟았고,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내게 한 힘내라는 말은 단순한 응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나를 땅끝으로 떨어트리는 말이 되어버렸다. 주변의 친구들과 연락을 끊은 것도 취준생이 되고 1년이 지날 때쯤이었다. 주변의 친구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다들 어디론가 취업을 하고 1년 차, 2년 차 승진, 이직 이야기를 해대는데 나는 그 이야기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과 내가 취준생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 게 원인이었다.


그들은 잘못이 없다. 그렇다고 내 탓도 아니다. 취준생은 누구나 격을 수 있는 시간이고 그게 조금 긴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었던 뿐이다. 그들의 응원이 길어질수록 서로 눈치를 보게 되는 건 우리들의 탓으로 치부할 수 없다. 그들이 내게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었던 걸지도 모르고, 나는 그런 응원을 받기에도 마음이 조급해져 받아들일 여유가 없던 것뿐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소상인들이 힘들어지고 아르바이트생들이 잘린다. 이건 아르바이트생 탓도 사장님의 잘못도 아니지만 생각 없는 사람들의 잘못으로 피해를 받는 건 다른 사람들이다. 코로나 19로 외출은 더없이 힘들어지고, 자격증 시험은 뒤로 미뤄졌다. 수많은 사람이 피해 받고 경제와 사회가 무너진다. 회사에 잘 다니던 사람들은 월급이 줄어들었다고 속상해하지만, 월급은커녕 다음 달 생활비나 낼 수 있을까 조마조마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나도 오늘 하루 돈을 벌지 못하거나 쓰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야 하는 세금영수증은 똑같이 날아온다.

취준생, 취포자, 백수는 사회적인 문제기도 하지만 그게 자기 자식일 때 부모들은 힘이 들고, 어쩌면 답답해서 뭐라도 하길 바랄 텐데 내 부모님은 방황하고 헤매고 있는 나를 억지로 끌어당기거나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모습도 조금은 밉기도 하고 다른 가족들처럼 차라리 화를 내고 한심하다 욕이라도 퍼부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나를 몰아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은 숨을 쉬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일 거다. 그동안 내가 아르바이트하면서 힘들어했다는 걸, 면접에 갈 때마다 청심환을 먹고 덜덜 떨면서 면접을 보고 펑펑 울다가 집에 돌아왔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들은 알고 있었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일자리를 찾으며 몰래 울던 나를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위해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짧은 산책이라도 하게 하기 위해 나를 데리고 외출하려고 했었다는 걸 이제 알게 되었다.


지금 나는 취준생이라고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솔직히 놀고먹고 있는 백수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미 졸업을 했고 다신 ‘학생’이라는 신분은 없다. 그냥 받아들이면 조금 마음이 편하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냐는 면접관의 압박 면접보다 더 무서운 건 이렇게 변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바보같이 보내고 있는 내 삶의 시간이 계속 흘러가는 거다. 이제 나에겐 무서운 시선을 견뎌내거나 아니면 도망치거나 하는 것 그 방법뿐이다. 하지만 도망은 오랫동안 쳐봤고 결국 제자리도 돌아온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내 가족이 기다려준 시간, 내가 나를 기다려준 시간을 나는 이제 나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 여전히 무섭고 두려움으로 가득한 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나는 이 길을 걸어가기 위해 깊게 파둔 동굴을 벗어나야 할 거고, 깊게 파 놓은 동굴을 나와 집 밖으로 내 발로 걸어 나갈 수 있어야 할 거다. 편안함을 포기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깨닫고 있다. 아무도 나를 꺼내주지 않을 것도 그러지 못할 거다. 나는 내 발로 들어간 동굴을 나가고 있다. 여전히 무서운 거 투성 일 거고 쉽게 좌절하고 금방 주저앉아 울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려움은 언제나 있었고, 불안도 나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게 됐다.

겁을 먹고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는 게 얼마나 씁쓸한지 아는 사람이기에 나는 괜찮아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앞으로 계속 나는 내가 가장 소중할 거고 나를 위해 살아가게 될 거다. 사소한 일로 운다고 나를 몰아세우는 일도 이젠 그만두고 그냥 펑펑 울게 내버려 둘 거다. 취업을 못 했다고, 면접을 망쳤다고 나를 채찍질하는 건 이미 너무 많이 다친 나를 더 아프게 하는 일 일 테니까 말이다. 안쓰럽고 또 안쓰러운 내가 나는 소중하다.

취준생들이 수십 번 수백 번의 불합격에 슬픔과 우울함에 빠져 많은 걸 포기하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삶만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부족한 나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생명이 소중한 건 누구든 알고 있고 소중히 해야 하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무력감과 수십 번의 실패의 경험으로 느끼는 좌절은 생명의 소중함 같은 건 보이지 않게 한다. 내가 그래왔고 여전히 그러니까 말할 수 있다. 나는 항상 실수와 여러 실패의 경험이 많은 탓에 어느 하나 쉽게 용기 내지 못하고 도전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도 여전히 실수투성이에 상처투성이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내가 살아가고 있는 건 죽음이 두려워서도 나로 인해 고생하신 부모님에게 효도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아마 잘할 자신도 없기도 하다.

걱정하지 말라고 글로, 말로 위로는 가능하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조차 걱정이 한가득한 사람이지만 우리는 때때로 남들의 글에 위로받고 남들의 말 한마디에 위로받는다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로 살아가는 용기를 얻어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는 걸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리 많이 살진 않았지만, 사람의 삶에선 희망보단 절망에 빠지는 게 쉽고, 성공보단 실패가 가까운 법이다. 그때마다 주위 사람들에게 위로와 응원을 받으면 좋겠지만 그런 행운은 누구에게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그러기에 나는 나를 위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오랫동안 혼자 살아오며 깨달았다. 주위의 좋은 사람들이 많다면 그건 굉장히 축복받은 인생인 거라는 걸 이제는 알 수 있다. 다양한 관계를 맺어보고 사람을 잃어도 보고 배신도 당해본 내가 그런 사람들을 정말 가끔 봐왔다. 비록 나에겐 스쳐 가는 인연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이었었다.

나도 워낙 쉽게 상처받고 쉽게 포기하고 쉽게 좌절했다. 그리고 언제든지 내가 나를 죽일 수 있다는 걸, 내 삶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냈다. 누구보다 죽음에 가까웠던 셈이다. 성인이 되기도 전에 나는 나를 언제든지 포기할 때를, 타이밍만 맞았다면 나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도, 취업 준비를 하고 있지도 않았을 거다. 아마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그 시절부터 나는 내가 중요하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도 내가 살아가고 버텨내고 있는 이유는 나를 위해서다 나는 여태껏 살면서 나를 위해 한 일이 한 가지도 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다는 변명을 할 수는 있지만 나는 나를 위해 선물 한번 산 적이 없고 나를 위해 맛있는 걸 먹어본 적도 없었다는 조금은 쓸쓸한 사실이 나를 살게 해주는 한 가지가 된 것이다.


사람을 살게 해주는 것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심엔 자신이 있어야 한다. 다른 물건들로 채워도 그건 아주 잠깐의 안식일 뿐, 구멍을 메울 순 없다.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중심을 찾아낸 사람들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아무리 다쳐도 자신의 중심을 잘 아니까 상처를 받아도 좌절을 해도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뭐든 자신이 가장 제일이어야 한다. 남들이 이기적이라고 욕할지라도 자신이 가장일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일이다. 내가 있어야 그다음이 존재하는 거니까 말이다. 내가 없으면 이미 거기서 이야기는 끝이 난 거다. 남의 이야기만 보고 살 순 없다. 나는 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수많은 좌절과 슬픔에 빠져도 나는 나를 지켜내야 하고, 나를 지키는 건 나 자신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대학 시절 중 1년간 나는 인간관계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아 소화 장애와 거식증에 걸렸었다. 그 후로 학교생활은 최악 그 자체였다. 수업도 겨우겨우 들으러 가고 성적은 엉망이었고 불면증에 잠도 잘 못 자는 날이 허다했다. 어느 날 밤에는 미친 사람처럼 큰 소리로 울기도 했고, 어떤 날은 집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거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딱 이대로 죽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지냈었다. 그런 나를 살게 해준 건 동네 친구이자 중학교 동창이었던 친구의 전화였다. 중학교 시절 취향이 비슷해서 친해졌던 친구였다. 그녀는 내가 힘들어하는 걸 알아차린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런 나를 위해 내가 혼자 자취방에 있을 때 전화를 해주곤 했었고, 금요일 저녁에 일을 마치고 몇 시간이나 걸리는 내 자취방에 치킨과 맥주를 사 들고 와 울고불고하는 내 모습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봐주며 그저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 덕에 나는 다시 문밖으로 나가 살아갈 수 있었다. 그녀 또한 일로 힘들어했음에도 그녀는 나를 먼저 챙겨주었다. 전화 너머 울고 있는 나에게 많이 운 만큼 맛난 음식들과 식사를 잘 챙겨 먹으라며 보내줬던 택배들도 다양한 커피 쿠폰도 잊을 수 없다.

그 누구도 자신을 망칠 수 없다는 그 말을 계속 되새기고 또 되새긴다. 세상에 못된 사람도 많은데 거기서 내 부족함을 탓하고 사는 건 너무 자신이 가엽지 않은가 그런 사람도 사는 세상, 나라고 못살 것 없다는 마음도 좋다.


뭐든지 좋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

죽고 싶어지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사실 다른 게 무슨 상관인가

죽음 앞에선 그 무엇도 가치는 없어질 뿐이다. 수십억의 물건이 내 목숨보다 소중할 순 없는 것이다. 돈도, 명예도 죽음 앞에선 모두 아무 쓸모 없다는 걸 사람들은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러지 말도록 하자.

내 삶이 있고 그 뒤에 생이 있는 법이다.

지금껏 자신이 살아 있던 이유가 어떤 이유에서라도 좋다. 당신은 살아있는 한, 오늘이 존재하고 내일이 온다.

이렇게 나는 또 한 번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오늘도 나는 다시 노트북을 열고 일자리를 찾는다. 면접용 사진도 새로 찍어야 하고 면접용 정장 하나 없고, 통장에 있는 팔만 원이 비록 지금의 나를 말 할 수 있는 유일한 거라 하더라도, 나는 여기 존재하니까 그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더라도 여기에 나는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나를 믿고 버텨낼 거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다른 나와 함께 버텨내고 견뎌내어 갈 것이다.


오늘은 일단 햇빛을 째러 옥상에 올라가 볼까 한다.

이게 내 첫발이다.

아깝게 됐상

이름
서여름공모주제동고 - 취준생 리얼 현실 취준라이프
대상구 취준생 ( 현 직장인)제목바닥부터 차근차근 나를 다져 올라가기


오직 논술만으로 상위권 대학을 가려다 떨어졌다.나의 적성과 맞지 않지만 취업이 잘 되고 , 내 성적으로 무난히 갈 수 있는 전문대 치위생과에 들어갔다. 글을 남들보다 조금 더 잘 쓴다는 자부심을 가진 채 이십대 초반을 보냈다.졸업 후 치위생사가 되었다. 3년간 적성에도 맞지 않는 치위생사로 일 하는 동안 점점 지쳐갔다.

내가 이 직업 말고 다른 직업은  다시는 가질 수 없을까? 나는 아직 젊은데.... 다시 시작해 볼까?창밖을 바라보며 멍때리고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던 중 어느날 우연히 한 광고를 보았다. 한 줄의 글귀가 내마음을 울렸다.형형색색의 화려하고 창의력 넘치는 광고들을 접할 때 마다 내 마음 속에서 새로운 꿈이 자라고 있었다.

'나도 다시 글을 써 보자!' ' 내 가슴이 울리는 살아 있는 일을 하자!' '광고라는 동적인 일을 시작해 보자!'

카피라이터가 되기로 결심했다. 광고 문구를 제작하는 업  글로 사람을 웃게도 하고 울리기도 하는 업나의 두 번째 새로운 업으로 정했다.

하지만 나의 전공은 카피라이터,광고제작 과는 전혀 관계 없는 전문대 치위생과 졸업생일 뿐이었다.

가슴이 막막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몆날 며칠을 고민했다. 적성 검사도 다시 받아 보았고, 심리 검사도 해 보았다.문학, 작가 쪽이 맞다는 결론과 함께 나는 다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돈도 시간도 많지 않았기에 나는 국비지원을 통해 편집 디자인을 9개월 동안 배우러 다녔다. 왕복 3시간 거리로 매일 말이다.왜 카피라이터가 편집디자인 과정을 들을 생각을 했을 까? 그때만 해도 글만 쓸줄아는 카피라이터 보다는 디자인적 감각도 갖고 있는 내가 좀 더 메리트가 있지 않을까? 라는 스스로의 차별성을 기르기 위한 선택이었다. 결국 이 차별성 있는 나의 선택은 추후 취업과 일하는 동안 큰 도움이 되었다.

편집디자인 과정이 내게는 매우 어려웠다. 디자인과 관련된 분야의 사람들이 나의 동기들이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주된 흥미 분야도 아니었거니와 나의 자인적 감각이 평균 이하였기 때문이다.하지만 나보다 몇 살 어린 동생 부터 50대 아주머니까지 같이 듣는 수업 속에서 우리는 우정을 쌓아갔다. 내가 디자인을 잘 못 한다며 타박도 하면서도 주변 인들이 나를 많이 가르쳐 주고 도와주었다. 

이들과 함께한 시간동안 참 행복했다. 함께 수업을 듣고서 된장찌개를 먹으러 가기도 했고, 청계천을 거닐며 산책하기도 했다. 저렴한 아이스크림을 몇 개 사서 나눠먹기도 했다. 4년전인 이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매년 강사님과 함께 모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의 배고프고 걱정 많았던 시절의 소중한 인연이라 더 정감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꾸역꾸역 작품을 완성한 9개월이 지났다.디자인 포트폴리오는 하나 완성 되었지만 , 좀 더 카피라이터에 특화된 관련 교육이 필요했다.광고적인 마인드와 시야를 기르기 위해 이번에는 코바코 광고교육원 광고교육 과정을 신청했다. 정말 나의 바닥인 능력과 전공을 상쇄할만한 나만의 독보적인 커리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나는 카피라이터에 대한 수십권의 책을 사서 읽었다.읽고 또 읽으며 공부했다.실력을 쌓고 키우기 위해 다양한 슬로건과 카피 네이밍 공모전에 집중적으로 참여했다.


처음에는 장려상 그 다음번에는 우수상 몇 백 번의 도전 끝에는 최우수상 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코바코 광고교육원 디딤돌 과정에도 합격했다. 나는 집에서 왕복 5시간 거리를 6개월 동안 매일 광고에 대해 배우기 위해 다녔다. 아침부터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밥을 많이 먹은 뒤 집을 나섰다. 나는 하루 세끼를 챙겨 먹을 수 없었다.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노력을 갈고 닦은 덕분에 그 교육 커리큘럼 안에서도 조금씩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나의 카피가 하나 둘 강사분께 칭찬 받기 시작한 것이다.


취업을 위해 시간을 쓰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또한 돈이 없었다.  부모님께 손벌릴 처지도 아니었고, 당장일을 해야 하는 형편에 실력과 경험 학습을 하겠다고 1년 6개월 동안 일을 전혀 할 수 없었기에 나는 하루에 김밥 1줄을 먹으면서 배를 곯으며 광고 공부를 했다.

결국 나에게는 디자인 포트폴리오와 광고 교육원에서 교육받은 내공이 근 1년 6개월 간의 나의 취준생 생활의 결과물로 나왔다.

나는 이 두 권의 재산을 들고 여러 군데에 면접을 보러 다녔다.

하나같이 왜 전공과 전혀 다른 이 분야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 검증 결과를 거쳐야 했다.조금은 약간은 서러웠다. 나의 노력과 과정은 보지 않고 나의 전공만을 보다니 ....하지만나는 결국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한 직장에서 대표님께서 나와 2시간 정도 광고 관련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면접) 을 나눈 뒤 나를 채용해 주셨다.


나도 드디어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내가 직접 지은 네미밍이 들어간 마스크가 시중에서 판매 되었고, 우체국 달력 안의 카피가 완성되었다.자동차 카탈로그가 멋있게 나오기도 하고, 어린이 교구를 제작하기도 했다.

나의 의지와 노력 그리고 열정으로 바닥부터 다져서 차근차근 올라왔다.결국 나의 직업을 바꿨고, 나의 가치관을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길은 찾으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십대 중반 나의 전공과 전혀 다른 분야에 당당히 취직을 하면서 몸소 깨닫게 되었다.남보다 몇 배 더 노력한다는 간절함과 의지가 면접때[눈이 빛난다]라는 말을 듣는 사람으로 타인에게 비춰졌다.


열정이 담긴 도전은 언제나 기필코 승리한는 사실을 얻은 고군분투 나의 취업성공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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